어제는 바람아래 어린이집(발도르프 교육철학으로 운영하는 어린이집입니다)에서 부모모임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래서 평소 아이 엄마가 집으로 데리고 오던 것을(어린이집에서 집까지 오는 시간이 약 1시간 정도 되지요) 제가 데리고 오는 날이었습니다.  오랜만에 서영이랑 같이 오는 길이라 정말 아이 말에 토 안달고 긍정적으로 들어주고, 재밌는 얘기도 나누며 왔습니다.  회기역에서 내리던 것을 청량리역에서 내리자고 해서 하고싶은 것을 막지 말자는 생각에 시간이 좀더 걸리지만 그렇게 하도록 해주고 즐거운 분위기로 집으로 왔지요.

근데 집에 와서 시간은 늦은 데다 서영이가 저녁을 먹기 싫어하는 것이었습니다.  은준이는 밥을 너무 잘 먹어 탈이고 첫째는 너무 안먹어 부모 애를 태웁니다.  밥을 입에 담고 계속 삼키지 않는 버릇(?)이 있어서 어른 입장에서 답답한 거지요.    또 엄마가 늦게 오니 엄마 오기 전까진 아빠랑 은준이랑 자고 있자고 해도 할머니랑 자면 안되냐고 소릴 합니다.  속이 상하고 잔소리가 시작되었습니다.  평소 맘 먹기로 최대한 서영이를 혼내지 말고 자유롭게 하도록 해주자 다짐하고 다짐하였지만, 모처럼 아빠랑 있는 시간이 아빠의 혼냄에 주눅드는 시간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은 울음 터뜨리고 저도 왜 우냐고 윽박지르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처음 서영이 말이 울먹거리면서 "할머니가 TV를 안보시면 안되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뚱딴지 같이 할머니에 대한 얘기가 왜 나오냐고 물었지요.  다음 서영이 말이 아빠랑 같이 안자면 안되냐는 얘기였습니다.  평소 아이엄마가 없을 때는 저와 아이들이 같이 자곤 했기 때문에 기분이 좀 나빴습니다. 아빠랑 자는 게 왜 싫으냐, 아빠가 혼내서 싫으냐라고 다그쳤지요.  그런데 서영이 말이 "아빠랑 같이 자면 은준이랑 아빠랑 남자가 두 명인데, 여자는 자기 혼자라서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도 여자인데 할머니랑 같이 자고 싶다"는 거예요.  또 씻고 나서 "책 안 읽고 은준이랑 안놀고 그냥 쇼파에 앉아 있으면 안돼요?"라는 겁니다.  왜냐니까 "그냥 기분이 안좋아서요."라고 합니다.  처음 들어보는 얘기에 대답을 못해 주었습니다.  울면서 하는 말에 우리 아이 생각이 이렇구나, 내가 이런 아이 생각을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면서 할 말을 잃었습니다.  할머니 TV 안보시면 안되냐는 얘기는 즉, 평소에 아이들 TV를 전혀 안보게 하기 때문에 할머니 방에서 같이 자려면 할머니께서 TV를 안보시면 되지 않느냐라는 얘기입니다.  할머니랑 같이 자고 싶은 마음에 그런 생각까지 하다니..

혼내면서도 제 마음 속엔 혼내면 안되는데..라는 게 있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는데, 아이 말을 듣고 있으니 마음이 착잡해졌어요.  밥은 먹여야겠고, 아빠랑도 친해져야 해서 같이 자고도 싶고 하는 마음이 전부 부모의 욕심인가 하는 생각에 또 서영이에게 미안해졌습니다.

씻기고, 양치해 주고 나서 서영이에게 아빠가 너무 혼내서 미안해라고 말했습니다.  마치 어른한테 미안해 하는 기분이 들더군요.  서영인 금방 풀어졌습니다(진정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는 건 아니겠지요).   할머니 방으로 가기 전에 책을 서영 은준 3권씩 번갈아 읽어 주고 하면서, 아이 기분을 되살리려 노력하다가 아이들 눈꺼풀이 잠기는 걸 보고 서영인 할머니 방으로 보내고 은준인 저랑 같이 잤습니다.

참 부족한게 많은 아빠 같습니다.  서영이 밥 먹이는 문제는 따로 생각하더라도 아이를 혼내지 말고 사랑을 많이 주어야 하는데, 모처럼 아빠랑 지내는 시간이 오히려 아이에게 부끄러운 하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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